일본은 아직도…(식민지의 철도는 일본 철도기술의 상징이었다?)

posted in: Essay | 0

취미로 수집하게 된 일본의  “철도 전노선”.

 

아사히신문사에서 출판되는 아사히 주간백과의 2009년 7월부터 2010년 7월까지의 1년분 50권짜리 잡지다.

이중 32번째권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철도사의 무대(鉄道史の舞台)에 좀 껄적지근한 내용이 있어 본문 스캔본과 함께 해석을 첨부해 본다.

(편집과정에서 약 한두줄 정도가 지워진듯 한데, 첨부한 해석본을 참고해 주시길…)

 

 

 

(보는 방향은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해석해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태평양 전쟁에서 질 때 까지, 일본은 몇 개의 식민지를 지니고, 지배․경영을 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철도경영은 최중점 과제가 되어 조선반도와 대만 남만주(현 중국 동북부의 남쪽) 등에서 철도노선을 건설․운영해 왔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1895년에 일본령이 된 대만에서는 청조통치시대의 1893년 까지의 개통된 지롱(키룽, 基隆)~신주(신치쿠, 新竹)간의 약 100Km가 대만통감부에 인계되었다. 이후에도 철도 건설은 계속되어, 1908년에는 지롱(키룽, 基隆)~가오슝(카오슝, 高雄)간의 약 400Km가 전부 개통되고, 대만 서부의 남북의 교통기반이 확립 되었다. 여객 이외에 장뇌(식물 이름)등의 주요한 수출품을 운반했다. 이외에도 현재는 관광노선으로 인기인 아리산 삼림철도 등도 일본 통치시대에 건설 되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1905년에 일본에 할양된 가라후토(사할린섬의 남반부)에서는 그때까지 철도가 없었지만 다음해 12월에 코르사코프~블라디미로프카 사이에 군용 경편철도가 개통되었다. 부설공사를 한 것은 육군철도대대(후의 철도대대) 였다. 철도대대라는 것은 청일청일전쟁에서 철도의 필요성을 통감한 군대가 설치한 부대로써, 러일전쟁에서 조선반도와 만주 각지에 철도 건설과 수선을 맞는 등 외지의 철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태평양전쟁 때 철도연대가 건설한 것이 영화「戰爭にかける橋」으로 유명한 타이와 미얀마(버마)를 잇는 태면철교(콰이강의 다리) 이다.

 

남 가라후토(사할린섬)의 철도는 후에 행정기관으로 있는 가라후토청에 이양되어 노선망은 전 섬으로 확대 되었다. 종전 후의 소련침공과 점령으로 남 가라후토는 소련의 실효지배 아래에 놓이고, 철도도 소련에 인계 되었다. 지금도 사할린의 철도는 일본 통치시대에 건설 된 노선을 기초로 해서 러시아 철도가 운영하고 있다.

 

조선반도의 첫 철도는 1899년에 개통했다. 그 노선은 서울( 일본인은 당시 경성(京城)이라고 불렀다.)의 노량진과 인천의 제물포 사이를 연결한 경인선이다. 이 노선은, 일본이 조선정부로부터 부설권을 얻어 건설했다. 당시는 아시아 각지에서 구미 열강이 철도 부설을 겨루던 때로, 타지로 부터의 부설권 취득은 드물지 않았다. 경인선의 부설권도 한때는 모리스라고 하는 미국인이 취득했었다. 1905년에는 서울~부산간의 경부선이 개통, 다음해에는 신의주 까지의 경의선도 개통 되었다. 이들 조선반도의 철도 노선은 한국병합 후 조선통감부의 관할이 되고, 반도 각지를 잇는 노선망이 구축 되었다.

 

만주에서는 러시아가 건설한 동청철도의 일부가 러일전쟁의 승리로 양도되어 1906년에 발족한 남만주 철도(만철)가 운영하게 되었다. 초대 만철총재에는 대만통감부의 민정장관등의 실적을 갖고 있던 고토 신페이가 취임했다. 고토의 지휘를 바탕으로 만철은 철도운영을 계속 하며 호텔 경영에서 탄광 개발까지 온갖 사업에 뛰어들었다. 또 만주 경영을 위한 조사기관 이었던 만철조사부를 세우는 등 일본의 만주 지배의 중심적인 존재로 성장 해 갔다.

 

대만이나 남 사할린의 철도와 비교해 조선이나 만주에는 보다 정치적 색채를 띠는 경향이 있어, 여러 차례 국가간의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만철이나 조선철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의 일익을 짊어지고, 신바시에서 파리나 베를린행의 표를 발매했다. 메이지 말 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 정치가나 외교관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작가나 화가, 스포츠 선수들도 철도를 이용해 유럽으로 건너가기도 하면서 화려한 한 시대를 이루었다.

 

1934년에 대련(다렌, 大連)~신경(신징, 新京)사이(후에 하얼빈까지 연장)의 구간에 등장한 「아시아」호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일익을 담당하는 특급열차로써, 일본 철도기술의 높은 수준을 세계에 알렸다. 「아시아」호는 팽창을 계속하는 식민지 지배의 상징인 동시에 일본의 철도사의 하나의 절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쟁시 필요해 의해, 식민지 지배와 경영을 위해 건설할 철도를, 외지에 설치해 경영하고 운영했다고 술술 풀어내고 있는 이 사람들.

그리고 철도의 건설 이전에 비상식적인 노동 착취와 토지 약탈등을 일삼은 군대에 대해 외지 철도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말.

각종 편법과 조선왕조에 대한 협박, 친일파를 동원해 우리나라의 철도 부설을 방해해 가며 미국인에게서 뺏은 부설권을

그때 당시에는 부설권의 취득과 양도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뉘앙스의 설명.

그리고 마지막 단락에서, 식민지 지배를 통해 자신 나라의 철도기술의 높은 수준을 세계에 알렸다는 말과

식민지 지배의 상징으로 철도가 있었다는 서술까지…

 

식민지 지배와 착취에 대한 반성보다는 식민지 지배 시절의 낭만과 추억만을 되짚는 글이 아닌가 싶다.

구지 그나라 사람들만 보는 잡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는것도 웃기긴 하지만

공인된 언론중 하나인 아사히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이고, 온국민이 보는 책에

분명 잘못한 점이 많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글을 이런식으로 서술하는것은 옳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잡지를 읽는 도중, 발끈해 스캔부터 해석까지 해서 올리긴 하지만 어설픈 의역과 오역이 중간중간 있을가 걱정도 된다.

하지만 글을 읽으며 이건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해석을 정리하고 간단한 생각을 달아보았다.

 

역사왜곡. 이것도 그것들 중 한 부분은 아닐런지.